나도 학폭 피해자였다.

병원에서 “더 글로리”를 정주행해서 보고 있자니 학교폭력을 당하던 학창시절이 생각이 나서 몇 글자 적어본다.

생후 6개월때부터 고열로 인한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게 된 나는 말도 어눌하고 온몸이 뒤틀려서 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학교도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다니면서 더욱 그러했다. (프로필 참조)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나고 중학교에 입학할 시기에 우리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 새로 입학하는 중학교에는 아는 친구가 전혀 없었던 대다가 다들 질풍노도의 시기여서 인지 나의 장애를 보고 놀리는 아이, 약자라는 이유로 아무 이유 없이 때리는 아이들뿐이었다. 전 학교를 통틀어 친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왕따와 학교폭력이 너무도 심해서 항상 자살을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중학교 때의 학교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때리는 것도 모자라서 공부시간에도 때리기 시작하였고 공부 시간에는 아이들이 도망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나마도 멀쩡한 왼쪽 다리로 나를 때린 아이들을 차면 언제나 선생님께 혼나는 것은 나였다. 선생님들은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나만 혼내셨다. 점심시간에 아이들은 항상 나를 때리거나 내 도시락을 가지고 축구를 하거나 쓰레기통에 내 도시락을 넣는 농구를 하여 언제나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집단 학교폭력은 계속 정도가 심해져 어떤 날은 아이들끼리 눈병에 걸린 눈을 닦은 휴지에 물을 묻혀 나의 눈에 마치는 게임을 하는가 하면 샤프를 던져서 내 손목에 꽃이게 하는 엽기적인 게임 등을 즐겨했다.

어떤 날은 너무도 괴로워 점심시간에 학교 밖으로 나와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그때 왜 자살을 하지 않고 무엇이 나를 지금까지 살아있게 했을까? 그것은 분노였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세상에 대한 분노, 나를 괴롭히는 저런 아이들도 악착같이 살아가는데 억울하게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강렬한 분노가 나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분노 외에도 다른 것들이 있었다. 엄마의 사랑 등 여러 이유가 삶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내 목덜미를 끌어당기고 내 발을 멈추게 했다.

자살을 시도하고 자살에 도달하기까지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외로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자살은 보통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엄청난 용기가 스스로를 죽이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다. 이때부터 나는 그 용기를 장애인으로써 이 사회에서 살아나갈 때 필요로 하는 원동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소홀했던 공부도 열심히 하여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반에서 40등 이였는데 3학년에 올라가면서 5등으로 성적이 껑충 올랐고 이때부터 아이들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선생님들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여 학교폭력도 거의 사라져갔다.

나는 “더 글로리”에서 처럼 학폭 가해자들에게 직접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잘 사는 것이 더 큰 복수라고 생각하고 정말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아서 학폭을 이겨내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때 받은 학폭의 상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아 성인이 되어서도 한참 동안 계속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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